어릴 적 나는 배가 고프면 할머니한테 달려갔다. 마음이 허할 때도 그랬다.
향긋한 냉잇국을 원샷하면 새학기 긴장된 마음이 따뜻해졌고
친구와 다퉈서 속상해하고 있을 때 밥 먹자, 하는 목소리에 가보면
새콤달콤한 양념에 무친노각비빔밥에 고소한 콩국수가 기다리고 있었다.
노각은 흐물흐물해보이는 겉모양과 다르게 숨을 쉬는 양 식감이 좋았다.
가을이면 유난히 살이 찐 고등어 반찬들로 내 뼈와 근육들도 자라났다. 추운 날에는 슬러시같은 얼음이 숨어있는 동치미에 할머니가 손수 길게 찢어주시는 김치찜으로 밥 한 그릇 뚝딱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책을 읽었다. ‘시집가기 전에 할머니한테 김장하는 법이랑 노각비빔밥은 꼭 배울 거야’라고 호언장담 했는데 할머니는 보물 같은 비법을 손녀에게 남기지 못하고 가셨다.
서른 해 가까이 해주는 밥만 먹던 내가 결혼을 했다. 요리 실력은 그대로인데 집들이부터 손님 대접 같은 큰 행사는 물론이고 매일매일의 집밥이 내 일이 됐다. 찌개나 국 메인 반찬까지는 백종원, 유튜버 심방골주부 등의 레시피를 참고했지만 의외의 복병은 반찬이었다.
이전에는 밥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반찬거리들이 없다는 게 이렇게 아쉬운 일인지, 나물을 비롯한 반찬들의 유효기간이 이렇게 짧은지도 몰랐다. 반찬은 살림처럼 끊임없는 성실성을 필요로 하는 분야였다. 크게 마음을 먹고 제철 봄동을 사서 봄동전, 봄동 무침, 봄동 겉절이 등 각종 반찬을 반나절이 걸려서 해놨지만 두 끼 해결하고 나니 동이 났다.
그 무렵 반찬 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. 일산의 대표 학원가를 지나 후곡마을 4단지에 이르면 부동산과 자전거 가게 사이에 빨간 글씨의 간판이 보인다.
요새 우후죽순 생겨난 반찬 가게와는 달리 오래된 단골 고객이 많을 것 같아 요새 어떤 재료가 제철인지, 식재료 시세가 어떤지를 몰랐다간 불편한 경험을 할 것 같아 오랫동안 들어갈 마음을 먹질 못했다. 그러다 유난히 피곤했던 퇴근길 홀린 듯 가게로 들어갔다.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잔뜩 긴장했는데 높은 톤으로 환대해주는 사장님이 아저씨여서 놀랐고 사근사근한 어투로 제철 반찬을 소개해주셔서 집밥에 허기졌던 마음을 마음껏 내비칠 수 있었다. 돌아오는 내 손에는 목살김치찜에 도라지, 취나물, 머위나물에 겉절이가 들려있었다. 남편이 좋아하는 오징어 초절임, 진미채도 샀다. 두 손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. 그날 집에 와 정성스레 반찬들을 밥상에 올려놨다. 솥에 푹 쪄서 한껏 부드러워진 김치 줄기를 손으로 찢어 흰 밥을 감싸 입에 넣었는데 불현듯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다.
나는 그날로 마음이 허할 때마다 그곳으로 갔다. 놀랍게도 미소찬방은 매일 도라지, 고사리, 취나물 등 서른 가지의 나물을 내놓는 곳이었다. 반찬이 필요로 하는 성실함을 갖췄으면서도 요일마다 특식처럼 나오는 등뼈감자탕, 닭볶음탕이 매번 다른 설렘을 줬다. 여기에 백화점 마감세일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가격이 만족감을 더한다. 좋은 재료를 쓴 나물류를 단 돈 만원에 3~4팩 살 수 있는 곳이 이곳말고도 있을까. 파래무침은 단돈 천원이다.
그동안 나만 알고 싶은 맛집이었건만 최근 미소찬방이 지상파 한 방송 프로그램(SBS 생방송투데이 9월 27일자 관련 링크 바로가기)에 소개됐다. 방송에는 김치만두, 등뼈감자탕, 대하찜이 등장해 멀리서도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. 단골로서 방송에 나온 메뉴는 미소찬방의 별미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걸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.
방송 말미에 이영희 대표는 “10년, 20년 뒤에도 맛있는 반찬가게로 남고 싶다”며 웃었다.
그 웃음에 나도 큰 위안이 됐다.
내게 일산 맛집의 양대 산맥은 일산칼국수와 미소찬방인만큼 오래오래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. 나도 맛있는 집밥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.
혹시 나처럼 미소찬방의 간판을 멀리서만 보고 망설인 사람들이 있다면 주저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가봐도 좋겠다.
사장님의 정겨운 목소리에 기분은 좋아지고 두 손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돌아올 수 있다.